2009년 5월 30일 토요일

쉼터




쉼터


신께서 내게 무어라 하지 않았어요
단지 나는 당신이 존경스러웠을 뿐이에요
내 마음에 있는 자존심이
당신을 받아들이도록 허락했어요
그늘진 가로막 아래
시원한 쉼터가 되어 드릴께요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친구야


친구야


친구야
비 오는 날엔 말이다
간절히 네가 보고 싶어
우울하단다

친구야
비 오는 날 너와 마시던
동동주 한 사발에
짊어진 넋두리를 털면서도
참 행복했었다

친구야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니
눈물을 적셔주는
그 헤아림을 느껴봤냔 말이다

친구야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엔 
네가 정말
보고싶다

깊은 우물



깊은 우물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한 곳만을 향한다
그리고 달콤한 듯
가슴 떨리는 심연을 지녔다
내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고호한 깊은 우물,
그것의 세계가
나를 매혹시킨다
차마 나는
헤어나올 수 없다

지극히 달콤한 
우물의 유혹이다

2009년 5월 25일 월요일

걸리버 여행기 - 추모시

 


걸리버 여행기 

- 고 노무현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며




진정 우리가 만든 대장이
그렇게 힘없이 사라졌단 말인가

거짓과 썩은 심장을 도려내고
우리 스스로 폐부를 드러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선택했던 대장이

그렇게 사라졌단 말인가

그는 내가 애타게 찾고 있던
휴이넘이었을지도 모른다

척박한 이 땅에서

서민으로 태어나
서민의 힘으로써
서민이 승리한 표상이었다

그가,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는 너무 나약했나보다
그 더러운 대장의 표상이기엔...
스스로 양심이 던지는 칼날을 견디기엔...

그는,
현명했다.




2009.5.
고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어떤 날




1. 비오는 날
장대처럼 퍼붓는
자랑스럽게 내 앞에 내리는 폭우
그러나 결국 파괴되버리는 아픔

2. 눈오는 날
포근하게 동시에 차가웁게
날 선 아름다운 결정체들의 향연
하지만 허무하게 녹아버리는 슬픔

3. 어떤 날
네 앞에서의 나는 비오는 날이었고
내 앞에서의 너는 눈오는 날이었다

4. 맑은 날
햇살 머금은 공기를 함께 호흡하고
대지의 미릿한 흙내음을 즈려밟고
살아있음을 스스로 기뻐할 수 있는 날
너와 내가 꿈꾸는 맑은 날

A lot Like Love? 원 나잇 스탠드?

제목 : 우리, 사랑일까요? (A Lot Like Love, 2005) 
감독 : 나이젤 콜 
출연 : 애쉬튼 커처, 아만다 피트, 캐서린 한, 칼 펜
기타 : 2005-05-20 개봉 / 106분 / 코미디,멜로,애정,로맨스,드라마 / 15세 관람가 


* One day Stand? or Some day Stand?
엄청난 나이차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서로의 '운명'임을 확인한 두 배우... 애쉬튼 커쳐와 데미무어
이 영화는 마치 이 두사람의 영화를 보여주는 듯 했다. 

여주인공역을 맡고 있는 아만다 피트의 모습은 흡사 데미무어의 젊을 적 미소를 머금고 있다.
갑작스러운 만남, 당혹스러운 섹스, 그리고 그들의 별난 사랑이야기...

세상에 사랑을 정의할 수 있는 낱말들이 많지만 그것들이 모두 옳은지는 아무도 모르지...
이들의 사랑은 그런 수사여구로는 도무지 꾸며지지 않는 모습을 띠고 있다.

톰보이처럼 거칠은 여성 록보컬의 모습에 호감갖던 어리숙한 남자와,
그 눈길을 놓치지 않고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 관계(?)를 해버린 당돌한 여자의 이야기다.

하룻밤 사랑을 One night stand...
밤이 아니라 낮이니 One day stand일까?

하지만 그들은 결국 7년동안 우연히, 아니 어쩌면 만나게 될 인연으로 몇번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 Some day Stand!! 
그리고 사랑한다.




* "하지마~, 망쳐버리쟌아~"
그런게다. 누군가 그려놓은 그림에 좀 더 완성해보겠다고 덧칠을 하다간 결국... 망쳐버렸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에도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진 않았겠지...
아마도 난 살아가면서 결국 망칠 걸 알면서도 하게되고, 망칠 걸 두려워서 하지 않는 두가지의
행동을 반복하는 것 같다.

하지마, 망쳐버리쟌아~
아쉬움이 있어야 사랑인가? 욕망을 만족하기 보다 욕망을 안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에밀리는 그걸 알고 있었다.



* Bon Jovi "I'll be there for you"
어리석은 놈... 올리버는 어리석은 현대 남성들의 표본이다.
멋진 미래가 내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 나의 미래는 내 능력과 비례하여 준비되고 있다고 믿는,
그리고 내 사랑도 내 변화에 맞추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 말이다.

그래놓고는 막판에 가서 기타들고 가서 I'll be there for you를 연신 불러댄다.
어쩌라고? 

사랑과 자존심은 이율배반이다.
이 영화는 결국 두 사람이 한 번씩 자존심을 버리고 상대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 사랑이 뭐길래?
영화 마지막 크레딧에 나오는 이 사진의 느낌이 참 좋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사진에서 배어나오는 이미지는 그런 것이다. 

오래된 친구, 내 치부를 드러내도 모든 걸 안아줄 친구, 고통을 나누어 줄 친구,
내가 기쁠 때 진심으로 더 기뻐해 주고, 늘 곁에 있어 없는 듯 하지만 사라지면 나의 존재가 의미 없어지는...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걸게다...
난 그런 사람일까? 
노력은 하는데 쉽지 않다.
난 머리가 너무 커버린 거 같다.

너 첩자지? - 저수지의 개들(쿠엔틴 타란티노)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2. 쿠엔틴 타란티노)

타란티노의 데뷔작/
돈 전혀 들지 않았을 초 저예산 영화/
최고의 네 남자배우와 완벽한 시나리오가 만들어 낸 수작/
.
.
.
.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 허구임을 알게 하면서도
그 안에 빠질 수 있게 만들 줄 아는 흔치 않은 최고의 감독이다.

 

게이샤의 추억(Memories of geisha)


개봉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영화다.
중국내에서는 결국 개봉되지 못했던가?
문화적으로 용서하기에는 중국도 한국 못지않게 감정이 섞여있나 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본식 화면예술의 아름다움에는 나 또한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을 소재로 한 영화에는 <파격적인 스토리>와 그들 <문화의 독특함>이 살아 있는 것들이 많다.
다른 외국 영화와는 달리 이 두가지가 일본 영화내엔 교묘히 조합된다.
또한 그로 인해 한때 MADE IN JAPAN은 모든 가치의 최고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국화와 칼>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게이샤란 것, 그것은 결국 창녀의 별반 다름아니다.
하지만 일본인 그들은 "작은 것으로부터 세계를 품는" 그들의 습성대로 창녀의 공간에도
예술적으로 보이려 애를 쓰는 흔적이 보인다.

"밤은 어둡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처음 사랑이 내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말했죠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로 가자고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숨어버려요 꿈조차 어두운 밤 베개위에 나란히 머리를 뉘면, 
우리들 속삭임조차 고요한 어둠속에 잠긴답니다"
-게이샤의 노래- 


'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 게이샤가 된다'는 다소 말이 안 맞는 이 영화는 결국 기괴한 일본의 성문화와 
아름다운 미녀 장쯔이가 만나 순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억지의도의 영화일 뿐이었다.
신세기에 접어들며 오리엔탈리즘에 빠져드는 서양인들의 가슴엔 그것들이 신비로워 영화적 소품꺼리로
취한 듯 하다.


내용보다는 화면의 아름다움과 장쯔이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빠져 들었던 영화로 기억될 듯...

아름다운 그녀들의 당당한 데뷔! Mrs. Henderson Present





 

 

 
 
 
  
 
Mrs. Henderson presents
 
Regie: Stephen Frears
Scenario: David Rose, Kathy Rose, Martin Sherman
Met: Judi Dench, Bob Hoskins, Will Young, Kelly Reilly e.a.
103 min. / UK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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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허무는 데 기여한(?) 헨더슨 부인의 남다른 사업시도를 보여준 영화다. 단순한 눈요깃 거리가 풍부한 영화라 생각되었는데 마지막 헨더슨 부인이 만들어 내는 반전은 흡사 영화 래리플린트를 생각나게 했다.

포르노 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플린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였다. 미국내에서 포르노 물에 대한 유통허가 법안을 얻어내는데 일생을 싸우며 그 나름대로의 논리를 주장한다.


퓰리쳐 상이 가지는 비이성적 집단 최면을 일깨우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 끔찍하고 비안간적인 상황들을 방관하는 사진 기자들을 비꼰다. 래리 플린트는 그보다 순수 감성에 소구하는 인간의 육체를 화각의 앵글에 담아 배포하는 것이 훨씬 더 양심적이며 이성적이란 것!

사실 둘 다 어느쪽이 절대적으로 옳다 할 순 없지만, <헨더슨 부인제공>을 보면서 서양의 역사에 있어서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허무는 데 비교적 노력한 이들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과연 예술은 21세기에 아우라(AURA)로써 의미를 갖는가?
복제가 0.0000001초에 이루어 지는 세상에 평면적 예술과 입체적 예술 사이에 어떤 기준이 외설로 존재하는가 말이다...

영화를 보며, 핸더슨 부인의 마지막 연설을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대위에 예술로써 올려진 나체의 무희들이 과연 작품인가? 그렇지 않다면 군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장치일 뿐인가?

또한, 예술의 존재적 의미와 상통하는 정의구현을 위해 행해지는 인간들의 극단적 예술로써 전쟁은 어떠한가?
전쟁은 과연 집단예술로써 작품인가? 아니면 몇몇 집단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허접한 장치인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이러한 메시지를 주려는 것 같았다.


"전쟁... 그 지독한 광기의 예술, 나에게는 인간 근본으로서의 지금의 그녀가 작품일 뿐..."
 

6월의 일기 - 김윤진























먼저 이 영화가 과연 15세 이상 관람가인지 물어나 볼 일이다. 왕따문화가 체감피부에 와닿지 않는 나에게 이 영화의 소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과연 15세의 청소년들은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느낌을 갖을까?

오히려 당연한 현상, 아니 오히려 제대로(?) 표현 못했다고 하려나?

영화가 가지는 시놉에 의한 재현의 미학에서 완성된 그것이 주는 심리적 강박이 정확하게 미치는지 안미치는지 나로서도 확신할 순 없지만, 이것 저것 영화를 보다보니 난 솔직히 이런 영화는 청소년 당사자들이 안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학교를 졸업한지 거의 20년이 넘어가는 지금의 내 나이에, 이런 소재는 공상속에 머무는 환각이다.
도무지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요 또래의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이다.

무서운 세상, 
우정이 없는 학교, 
사랑이 없는 관계, 
소외된 자를 보호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 되어버린 현실...

그렇다. 요즘 세상은 내가 옳은 일을 하면 그것이 내게 해가 될 수도 있는 사회인 것이다. 아이들의 작은 사회에서 이렇게까지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그 안에 방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정의와 개인의 양심을 운운하는 것은 솔직히 그 사람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영화 중 김윤진의 내면 심리변화에 따른 표정연기가 압권인데, 편집없이 롱테이크로 촬영된 이 부분에서는 왜 김윤진이 세계적인 배우로 등용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엄마라는 존재, 아이를 키워보니 사실 아이에게 정이가지 않을 수 없고, 그에 따라 과잉보호란 말에 대해 아이가 없던 때보다 이해가 가기도 하는 건 사실이다. [엄마]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아이]를 빼놓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에서의 엄마의 복수는 지극히 공감이 간다.

헌데, 요즘 엄마들은 어떠한가?
이 영화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에 대해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복수의 주인공 김윤진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엄마에게 바치는 레퀴엠이라고...
자기 아이 기죽인다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않는 엄마들...
내 아이 내가 키우는데 뭔 말이 많냐는 엄마들...

여기에 사회적 정의와 개인의 양심 들먹이면 난 바보가 되는거다.

내가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
나만큼은 내 아이를 그렇게 키우지 않는 거다. 
신해철도 방송에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우습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 사회에서 뻔뻔하게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 우습고 쓸쓸하다.

라빠르망 vs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Wicker Park)



 

96년도 작품으로 남녀의 애정관계에 대한 새로운 영상시각을 선 보였던"라빠르망"
"라빠르망"에서 처음 보았던 "모니카벨루치"의 이미지는 잊지 못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라는 다소 어색한 제목으로
프랑스식에서 미국식으로 재탄생한 <라빠르망>은 가벼운 제목답게 많이 가벼워졌다.

<라빠르망>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아파트가 현대사회에서 분리된 독립적 공간을 의미하듯
영화제목인 아파트는 엇갈리듯 출연하고 있는 연인들의 분리된 사랑을 각자 완성하는
독특한 장소로써 활용되어졌었다.

가벼운 제목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는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일까?

다각으로 촬영되어진 카메라기법과,
이중노출에 의한 독특한 편집 기법등이 돋보이긴 한다.

그래도 영화보는 내내 모니카 벨루치가 떠오르니
이 영화는 글쎄...

영원한 아프로디테~ 모니카여~